창세기 16장 1 ~ 6절
아브라함과 사래는 후손이 없었다. 그래서 조급한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을 스스로의 힘과 방법으로 이루려 노력했다. 그렇게 마치 이루어 낸 것 같았지만 그 결과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고 상황이 복잡해져 갔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지 몰랐던 것이다. 우리는 영의 사람으로서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한다.
1. 아이만 낳으면 되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약속하셨다.
창세기 1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린 지 10년이 지났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브라함과 사래는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신의 저주로 여겨졌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육체적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크게 실망한 사래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한다.
창세기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당시에는 본처가 아이를 갖지 못하면, 첩이나 하인을 통해 아이를 갖는 관습이 있었다. 여종인 하갈은 금세 임신하였고 문제는 여주인이었던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래는 실망감에 더해 억울함까지 들었을 것이다.
창세기 16: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래의 관점에서 보면, 사래는 나름대로 자식이 없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했으나 오히려 상황이 더 어려워지고 말았다. 즉, 아브라함의 자식을 갖게 되었으나 고통만 남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행동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4:22~23)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우리는 결과를 중요시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과가 보다는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느냐?, 어떤 과정을 통해 그렇게 되었느냐"를 중요하게 여기신다.
요한복음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으로 아무리 애써서 결과를 만들어도 결국 육일뿐이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영의 것을 낳아야 한다. 영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야만 영의 것을 낳을 수 있다. 즉, 성령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시길 원하신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누구의 힘으로 사랑하느냐 이다. 하나님의 힘이냐, 아니면 나 자신의 힘이냐 에서 결과적으로 우리는 나 자신의 힘으로 사랑을 이룰 수 없다. 돌아보면 우리의 힘으로 원수가 아니라 형제자매도 사랑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감사하면서 그 사랑으로 형제자매도 원수도 사랑하는 삶이다. 자녀가 집을 떠나서 아무리 선하게 산들 부모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서 아무리 선하게 산다 한들 하나님의 마음은 아프실 뿐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만드는 여러 육신의 결과에 대해서, 그것이 좋은 결과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는다.
본문의 말씀처럼 하갈을 통해서 아이를 낳든, 사래를 통해서 아이를 낳든 문제만 해결되면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우리는 착각하곤 한다. 또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내가 이룬 결과라 생각하며 자랑과 교만이 넘치게 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임을 기억하자.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은 성령의 힘으로 낳아야 함을 잊지 말자. 그렇게 주의 은혜를 구하며 하루하루 살아가자.
사래의 또 다른 잘못은 사래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래는 자신이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제외된 사람이라고 스스로 판단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정죄하였고 남편도 정죄하였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가지 못할까? 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를 탓하고 공동체를 탓하며 살아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자신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셨고 또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셨다는 것을 전적으로 믿어야 한다.
2. 좋은 게 좋은 거지!
사래는 하나님의 영의 약속을 육으로 이루려고 했다. 그래서 불가능했다.
창세기 16:2)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그러나 사래는 아브라함이 하갈을 거부하길 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갈을 바로 첩으로 삼았다. 인간적으로 사래가 얼마나 실망했을까? 심지어 하갈이 멸시했을 때 아브라함을 책망했다.
창세기 16: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분명히 아브라함의 결정은 사래와의 신뢰를 깨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미 1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한 번 더 약속해 주셨다.
창세기 15:4~5)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엘리에셀)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라함은 한 손에는 하나님의 언약을 다른 한 손에는 하갈을 붙들었다.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자식을 낳아도 좋고, 하갈을 통해서 자식을 낳아도 좋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지혜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런 자세는 믿음의 자세가 아니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적어도 문제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 사건 이후에 하나님은 13년 간 아브라함에게 침묵하셨다.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요동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만을 붙들지 못하기에 하나님과 멀어지고 흔들리는 것이다. 하나님만 붙들면서 끝까지 승리하는 우리가 되자.